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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특집④] 나도 좌익혐의 받고 죽을뻔했다

조회 수 2190 추천 수 0 2009.06.22 09:29:36
국정협 *.253.32.253
트루만 미 대통령의 확고한 결의 없었다면 미군의 한국전 개입 불가능..해마다 재행군인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16개국 참전 용사들을 만난다.
 ▲ 6.25를 맞은 박수길
  올해는 우리 민족사에서 영원히 잊혀질 수 없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59년째가 됐다.

 지원입대하러 갔으나 나이 어리다고 퇴짜

 우리의 젊은이들은 전쟁을 역사적으로만 배우지만 전쟁을 직접 경험한 우리세대는 지난 60여년동안 피와 땀으로 세계에서 자랑스러운 조국을 건설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게 되었고 해마다 6·25기념일이 다가오면 그때의 참상을 다시 되새겨 본다. 나는 그때 17세의 대구 공업중학교 학생이었는데 마침 학제 변경으로 새로 생겨난 대구 초급대학으로 막 입학한 때였다.

 1950년 초반 대구 공업중학교는 좌익학생 운동의 전초기지 같은 혼란이 있었으므로 학교를 옮기기로 했다. 당시 학생들간에는 소위 민주 청년동맹이라는 북한 공산조직이 친투하여 좌익운동은 전국적으로 만연되고 있었고 국대안 반대 등이 큰 이슈였다.

 6·25가 발생한 그날 나는 후일 국회의원이 되어 통일문제로 옥고를 치른바 있는 유성환 등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모여 흉흉했던 분위기 속에서 우리 젊은이들의 향방을 걱정했다.

 그때 대구 초급대학에는 후일 제3공화국에서 크게 활동한 白南檍 형법교수(공화당의장), 嚴敏永 행정학교수(주일대사), 이재철 민법교수(교통부차관) 등이 교편을 잡고 있었음으로 우리가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당시 친구들 가운데는 학도호국단, 학도병지원, 시골 등으로 가는 길이 갈라졌는데 나는 세 살 위였던 자형의 권고로 함께 대구 수창국민학교에 있던 헌병대로가 자원을 했으나 자형은 건강상의 이유로 나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 그래서 나는 시골로 갔다. 그러나 나에게 그때 일어난 한가지 사건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다.

 6·25나던 해 11월 미군과 함께 전방(포천)으로

 어느날 나의 시골집에 총을 맨 경찰 몇 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나에게 좌익 학생운동의 혐의를 덮어씌우면서 경북 영천 경찰서로 연행해 갔다. 그때 인민군은 진출하였고 공기가 극히 흉흉할 때였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고문으로 인한 신음소리를 들으며 경찰서에서 일주일을 지냈는데 그때 1사단 수색대대장을 하면서 안강 전투에 참가하고 있던 사촌형이 내 소식을 듣고 급히 경찰서로 찾아와 나는 겨우 풀려났다. 그때는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혐의만으로 처형된 사람이 적지 않았으니 나는 운이 아주 좋은 셈이었다.

 나는 고향은 경북 경산군 압량면 백안동, 대구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가량 떨어진 벽촌인 그곳으로 가서 가족들과 6·25의 전반을 살게 되었다.

 트루만(미 대통령)결의 없었다면 미군의 한국전 개입 불가능했다

 그런데 서울이 인민군에 의하여 사흘만에 함락되고 일주일만에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으로 내려온 상황이라 시골집에 있으면서도 멀리 대포 소리가 들리곤 했다. 전쟁이 난 그 해 11월경에 우리가 거주한 시골 근처로 미군의 후속 부대들이 진입하기 시작, 그들은 먼저 경북 영천에 주둔했다.

 일본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 휘하의 미군들은 이미 한국으로 파병되어 오기 시작했는데 경북 영천으로 온 미군은 미국 아카소(Arkansas)주 국토방위군(National Guards)에서 파견된 제936포병대였다.

 나는 시골의 피난생활을 몇 개월 한후 대구로 돌아와서 중학교 친구 20∼30명과 함께 자원봉사대를 조직하여 역전광장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영천에 주둔한 미군이 대구 미군PX에 와서 물건을 산다면서 말을 걸어와 중학교에서 배운 서툰 영어로 인사겸 몇 마디를 했는데 그 군인이 나에게 일선에 함께 가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집에와서 어머님에게 내 의사를 말씀 드렸다. 어머님은 일선으로 가는 아들이 걱정스러워 다소 주저했으나 결국 허락해 주셨다.

 그래서 그 해 11월경 미군들과 함께 일선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경기도 포천, 연천지역 이었다. 그때 미군 트럭을 타고 가면서 본 서울은 폭격으로 인하여 완전 폐허가 되어있었고 추위는 극심했다.

 나는 1년 수개월동안 미군 936대대와 숙식을 같이 하며 생활하다가 52년 중순경 어머님의 종용과 복학문제로 대구로 돌아와 복학과 동시에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때 대구에서 미군 후방지기 사령부가 있었는데 당시 대구시의 김종환(후일 국회의원 역임) 시장은 학교에 복귀한 나를 불러 통역비서관으로 채용하였다. 학교는 사실상 휴학을 한셈이 되고 말았다. 2년 후 나는 직장을 청산하고 2년여 늦게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였고 59년 졸업 후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미국의 한국전 참전은 트루만 대통령의 용기와 결단력 때문에 가능했다. 나는 6·25를 회상할 때 트루만 대통령의 결단력이 미국과 유엔의 한국전 개입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트루만 대통령은 북한인민군이 남침하던 그날 (미국은 1950년 6월 24일) 휴가차 그의 고향인 미조리주, 인디펜던스시에 도착,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은 북한의 남침 보고를 받은 즉시 휴가중인 트루만 대통령에게 인민군의 남침과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하고 트릭브 리 유엔사무총장과 협의, 유엔 안보리 긴급회의를 소집한 사실을 보고했다. 트루만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이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3차대전의 시발일수도 있다고 믿고 당장 워싱턴으로 귀환하겠다고 말했다.

 북한의 남침은 '유엔에 대한 전쟁'

 그러나 애치슨 장관은 휴가중인 대통령이 급거 워싱턴으로 돌아온다는 뉴스는 미국과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을 것이 분명하므로 대통령의 귀환을 하루 늦추도록 건의하여 그는 다음날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그때 트루만 대통령이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한말은 바로 한국방어에 대한 그의 확고한 결의를 나타냈다. "애치슨 장관,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The sons of Bitches(개새끼라는 경멸어)를 저지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그의 이러한 결의 표명은 설령 유엔의 승인이 없더라도 미국의 개입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는 점이 분명하다. 그는 분명히 북한의 침략을 스탈린 공산주의의 아시아로의 팽창정책의 일환으로 보았던 것이다.

 한편 6월 25일 긴급 소집된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스웨덴 출신의 트릭브 리 유엔사무총장이 북한의 남침은 "유엔에 대한 전쟁"이라고 선언하고 미국의 38선으로의 철수 및 한국지원결의 등 안보리 결의를 채택케 했다. 리총장의 이러한 공정하고 확고한 입장은 소련 비신스키 외상의 분노와 미움을 초래하여 그의 사무총장 2차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결국 중도하차를 결과하게 되었다.

 금년 6월은 벌써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59년이 되는 해이다.

 이때가 되면 해마다 재향군인회의 초청으로 16개국 참전 용사들이 한국을 방문하는데 나는 올해 한·캐나다 협회가 주최하는 캐나다, 호주의 참전 용사를 위한 만찬에 참가, 그들의 방한을 환영하고 축하했다. 나의 해외여행으로 미국으로부터의 옛 친구들은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아직 택사스, 오스틴에 살고있는 Dick Porter친구와의 우정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나는 1995-1998년까지 주유엔 대사로 재직했을 때 6·25때 만난 옛 친구를 찾아 아캔소 주 수도인리틀록(Little Rock)을 방문했다.

 그때 주지사는 지난번 미국 대통령 선거 때 매케인 후보와 함께 출마한 공화당후보 7인 중의 한사람이었던 목사출신의 헉비(Huckbee)씨였다. 그는 나의 리틀락 방문을 환영하는 큰 오찬을 주최했고 그 오찬에 참석했던 936포병대대의 Dick Porter부터는 눈물을 흘리는 감동을 보여주었다.

 좌경정권 10년 동안에 6·25퇴색, 對北경각심 희석

 6·25로 맺어진 한미간의 동맹관계는 그 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지만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초석이 되어왔고 이 과정에서 나도 개인적으로 미국의 옛 친구들과의 우정을 소중히 키워왔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사람들도 많지만 - 불행히도 아직 한반도의 한쪽에는 소위 선군정치와 핵무장으로남쪽을 위협하는 정권이 한반도와 지역안정에 큰 위협을 주고 있다.

 지난 10년간 좌경정권의 햇빛정책은 결과적으로 한국 국민의 안보의식에 많은 혼선을 자아내게 하여 6·25전쟁과 북한정권에 대한 국민적 경각심을 크게 희석 시켰다.

 59번째를 맞는 6·25가 우리에게 주는 귀중한 교훈은 온 국민이 힘을 합쳐 한반도에서 전쟁위협을 완전히 없애고 평화 속에서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더욱 튼튼히 구축해가는 일이라 하겠다.(한국논단 6월호)

 박수길(전 UN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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