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중 객지(客地)에서 접한 박세직(朴世直) 재향군인회장의 돌연한 부음(訃音)은 충격적이고 황당하고도 슬픈 소식이었다. 우선 가장 안타까운 일은 예정된 여정(旅程)에 몸이 묶여 있는 탓에 직접 고인(故人)의 영전(靈前)에 헌화(獻花)ㆍ분향(焚香)으로 명복(冥福)을 빌어드리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필자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일이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 같은 노고 때문에 고인 자신의 건강(健康)에 무리를 초래했음이 분명했을, 아직 이루어내지 못한 고인의 유업(遺業)과 유지(遺志)를 누가 과연 어떻게 이어서 챙길 수 있을 것이냐는 의문이었다.
27일 오후 향군 안보국장을 겸하고 있는 김규 ‘국정협’(‘국가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 사무총장이 오열(嗚咽)하면서 전화로 알려 준 고인의 영면(永眠) 소식을 듣는 순간 필자의 뇌리(腦裏)에서는 문득 2주일 전인 지난 13일 있었던 ‘자국본’(‘자유대한지키기국민운동본부’) 이사회 모임에서 있었던 한 해프닝이 따갑게 되살아났다. ‘자국본’은 “목사님들과 예비역고급장교출신, 그리고 자유대한민국 중심으로 자유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주로 참가하는 사단법인 기독교 단체인 ‘안경본’(‘대한민국의 안보와 경제 살리기 국민운동본부’)이 최근 명칭을 개칭한 단체로 그가 다니는 교회의 장로이기도 한 고 박세직 회장이 이 단체의 이사장 직을 맡고 있었다. 13일에 있었던 ‘자국본’ 이사회는 고인이 불참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고인의 불참 사실이 이례적(異例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그의 불참이 다른 일정과의 중첩(重疊) 때문이었으리라고만 생각했을 뿐 이미 그가 병환(病患) 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이날 ‘자국본’ 이사회에서 사회자는 한 목사님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이 목사님의 간결하고도 황당한 기도 내용이 필자에게는 충격적이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노무현(盧武鉉) 씨를 데려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 사람을 마저 데려가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그리고 가급적 가까운 시일 안에 북쪽 땅의 김정일(金正日)도 데려가 주시기를 아울러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하며 기도드리나이다.” 27일 김규 씨로부터 고 박세직 회장의 부음을 듣는 순간 필자의 머리를 강렬하게 때리고 지나간 상념(想念)이 있었다. “하나님은 어째서 이렇게 공정하지 않으신 것인가?”라는 상념이었다.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대한민국 현대사(現代史)에 남겨진 군인이자 애국자로서의 고인의 위대한 족적(足跡)은 그의 화려한 경력(經歷)이 웅변(雄辯)해 준다. 그러나, 재향군인회 회장으로 재임했던 고인의 만년(晩年)은 두 가지의 국가적 과업에 봉헌(奉獻)된 것이었다. 그 하나는 “잃어버렸던 대한민국의 10년을 되찾기 위한 정권교체”였고 또 하나는 “이념적으로 훼손되었던 국가정체성의 회복”이었다.
고인은 2006년 이상훈(李相薰) 전 국방부장관의 후임으로 향군의 수장(首將)이 되었다. 고인이 이끄는 향군은 2007년12월18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이명박(李明博) 후보를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대한민국으로 하여금 10년간의 좌표류(左漂流)라는 ‘비정상’을 극복하고 우회귀(右回歸)의 ‘정상화’를 이끌어내게 하는 견인차(牽引車)가 되었다.
그러나, 선거를 통하여 이끌어 낸 ‘정권교체’는 국가정상화의 ‘시작’이지 ‘완성’이 아니었다. 제17대 대통령선거와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의 참패로 정권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부 안팎에 포진(布陣)한 채 작년 봄에 있었던 ‘광우병(狂牛病)’ 논란을 둘러싼 ‘촛불시위’를 통해 잃었던 기운을 회복한 이 나라 ‘수구(守舊)ㆍ친북(親北)ㆍ좌파(左派)’ 세력이 새 정부의 정치적 행보(行步)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서 ‘국정 정상화’ 노력을 조직적으로 방해ㆍ저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고인의 새로운 구국(救國) 행보가 여기서 시작되었다. 2003년부터 서울시청 앞 광장과 광화문 네거리 및 서울역전 광장을 무대로 노무현 정권의 퇴진을 위한 ‘민주회복’ 운동을 주도했던 100여개 애국시민운동단체들이 ‘국정협’(‘국가정상화추진국민협의회’)를 결성했고 고인은 기꺼이 그 회장직을 맡아 그 기수(旗手)가 되었다. 그 동안 그가 이끄는 향군은 ‘한국군 전시작전지휘권’의 조기(早期) 전환 반대를 위한 1천만명 서명운동을 선도하여 900만명에 가까운 서명자를 확보하기에 이르렀고 그가 이끄는 ‘국정협’은 그 동안 1948년 제주 4.3 사건 때 군ㆍ경의 ‘무장폭도’ 소탕을 ‘양민학살’로 왜곡하는가 하면 북한을 위한 간첩 행위자들을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둔갑시켜 국가가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등의 ‘비정상 상황’이 새 정부 출범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것을 시정하기 위한 투쟁을 주도했다.
그가 이끄는 ‘국정협’은 대한민국을 명백하게 위배하는 위헌문건인 ‘6.15 남북공동선언’과 ‘10.4 남북정상선언’의 무효화 투쟁을 주도했고 또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국가관을 오도하고 있는 교과서 내용의 왜곡 실태를 고발하여 이의 시정을 요구하고 이 같은 왜곡된 교육의 장본인들인 ‘전교조’ 교사들을 교단으로부터 추방하기 위한 투쟁도 추진하고 있었다. 다니는 교회의 장로로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한 고인은 ‘안경본’의 이사장직을 수락하여 신앙을 통한 ‘국가정체성회복운동’의 선봉장(先鋒將)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다.
정력적이었던 만년의 이 같은 노고가 건장했던 고인에게도 건강상의 무리를 초래했고 급기야 그의 돌연스런 운명(殞命)을 강요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지난 2년간 다행히 시국(時局)을 걱정하는 마음이 같아서 가깝게 지내는 가운데 오로지 봉공(奉公)일 뿐 일체의 사심(私心)이 없이, 더구나 그의 독실한 신앙심(信仰心)이 주변 사람들에게 늘 감동(感動)의 대상이었던 고인을 이렇게 느닷없이, 갑작스럽게 저 세상으로 불러가는 하나님의 ‘섭리(攝理)’가 과연 무엇인지를 필자는 의아(疑訝)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고인이 그처럼 정력적으로 벌여 놓은 ‘국가정체성회복운동’의 큰 횃불은 누가 과연 이어서 들고 앞장서서 나가야 할 것인가. 결국, 그 일은 산 자(者)들이 이어받아야 할 몫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으나 답답한 심회(心懷)는 주체하기 어렵다.
다만, 이렇게 우리를 떠난 고인에게 내세(來世)의 축복(祝福)을 빌면서 고인을 떠나보내고 나서 슬픔 속에 망연(茫然)해 하고 있을 유가족(遺家族)들에게 마음속으로부터의 위로(慰勞)를 보내 드린다.(konas)
李東馥(전 명지대 초빙교수/전 남북고위급회담 대표/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