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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특집②] 6·25는 나의 가족의 처참한 비극

조회 수 2056 추천 수 0 2009.06.22 09:12:33
국정협 *.253.32.253
척추에 맙힌 실탄 뽑아 딸 시집갈 때 목걸이 해주려했다
 ▲ 1951년 1월 미2사단 유격대원일때(오른쪽 이용만 일병)
 나는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에 들어오는 신입생들 상당수가 6·25전쟁은「북침」으로 발발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에「啞然失色」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자녀들에게 역사를 잘못 가르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어쩌면 사선을 넘어 최근 북한을 탈출해 온 사람들이 북한에서 배우고 들은 내용과 그렇게 똑같을 수 있겠는가?

 나는 치밀한 남침준비 현장에 동원되었었다

 탈북자들에게 나의 체험을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당신들은 6·25전쟁을「국방군인들이 쳐올라와서 용영무쌍한 조선인민군의 정의의 반격으로 남반부를 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으로 알고 있지요?" 교육때마다 물어보면 모두「그렇다」고 답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우리나라 고교 졸업생들이 어떻게 탈북자들과 인식이 같게 되었을까? 천지가 놀랄 일이므로 뒤늦게나마 나의 체험을 통해서 증언하고자 한다.

 강원도 북한 중부전선의 남단에 위치한 平康 고급중학교 학생때의 일이다.

 - 수업은 전폐하고 전교생이 동원되어 탱크와 군용차량이 화차에서 바로 내릴 수 있도록 평강역의 플랫폼을 높이 쌓아 철로 수준까지 올리도록 들 것으로 흙을 나르는 공사에 동원되었다.

 - 1948년 여름에는「평강역에서 38선까지 가는 남침용 도로신설공사장」에 동원되었다. 1가구 1인씩 무조건 동원되는 것이므로 연로하신 아버지가 동원되어 일하게 되었고, 나는 방학 때 아버지와 교대해서 공사장에서 15일간씩 일했다. 탱크 두 대가 교차 할 수 있는 넓은 자갈을 깔은 도로였다. 지게, 삽 등 완전한 수작업이며, 헛간 같은데서 자면서 먹을 것은 각자 지참했으며, 모든 노력동원은 당연히 무급이었다.

 - 1948년부터 내내 평강군 현내면의 비행장(북한 최남단 비행장) 건설에 무급으로 동원된 平康郡의 각 지역주민들이 우리 집 사랑방에 매일 15∼16명이 일주일씩 교대로 숙식하며 비행장 신설 공사에 투입되었다.

 남침준비공사 1948년 여름부터

 각자 밥을 해먹도록 되었지만 옥수수, 좁쌀 등 가져온 식량에 김치는 우리 집 것을 먹었다.

 - 1949년 9월 김화고급중학교로 전학 온 후의 일이다. 전쟁 임박해서는 수많은 인민군 탱크와 군 트럭이 매일 밤새도록 김화시내의 우리집 앞을 지나 남쪽으로 전진 배치하는 모습을 보았다. 낮에는 조용하다 어두워지면 탱크 구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또 한편, 중부전선을 가로지르는 철원∼창도간의 전차 통학생의 등교도 약 1주일간은 일체 불가능했다.

 무장한 군인과 군수물자 수송에 모든 화차가 동원되었으므로 학생이나 일반 통행은 금지되었고 학생은 학교 안와도 괜찮았다.

 6·25 전쟁이 나고 3일 후「영용무쌍한 인민군은 남반부 서울을 해방시키고...」운운하는 방송을 해대고 있을 무렵 고등학교 2학년 전교생은 군에 끌어가려는 신체검사를 받았다. 아버지는 나에게「귀가 안들린다」「눈이 안보인다」해라 하셨다.

 인민군 장교로 끌려갈 뻔했다

 어디선지 정보를 듣고 말씀하셨다. 그런데「안보인다」「안들린다」해도 신체검사 결과는 합격이라 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팬티 속에「돈 주머니」를 만들고 계셨고, 아버지와 큰아버님은「승만이가 죽게 되었구나」탄식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남한에 친척 있는 사람은 불합격시킨다더라. 본명은「승만」인데 매일같이「이승만, 김 구 타도」소리 듣기 싫어서 임시로 용만이로 바꾼 것이다.

 아버지는「남한에 친척있다」해라 하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최종적인 개인면접 시간에 정치보위부 장교가「남한에 친척 있느냐」물었다. 나는 남한의 육촌형과 북한의 형과 삼촌 이름을 많이 대며 남한에 살고 있다고 답했다. 호적등본을 들고 있었으므로 이름의 행열이 맞는 것을 보고 확인하는 것 같았다.

 면담자가 사방을 둘러보고 무엇인가 판결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알길 없었고, 밤새 한 잠도 못자고 아침에 학교에 가보니 나와 바로 내 앞에 면접받은 김정원 군만이 불합격이 되었다.

 뒤에 들은 소식은 그 때 끌려간 학생들은 장교로 임관되어 거의 다 죽었다 한다. 김정원군은 그 후 인민군 탱크 운전병으로 끌려갔다가 도주해 와서 나와 함께 월남,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령으로 예편해서 교통부 기획관리실장까지 했다.

 나는 신체검사불합격 소식을 들은 즉시 200여리 떨어진 하늘아래 첫동네라는 추가령의 목장으로 피신해 갔다. 그 목장에서 수의사로 형이 형수와 살고 있었다.

 추가령 목장으로 열세살난 어린 동생이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김화에서 평강에 와서 하룻밤 자고 세포면 추가령까지 이틀간을 걸어서 나를 찾으러 왔다. 군사증(제2국 민병등록증)을 받지 않으면 10년 징역에 벌금 물게 되어 있으니 즉시 받으러 오라는 아버지 말씀을 전하려고 어린 동생이 200여리를 걸어왔다.

 귀가길에 신작로 나무그늘에서 잠시 쉬는데 인민군 짚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다가 멈춰섰다.「나는 잡으러 온 모양이다」고 가슴이 철렁했는데 그 장교는 자기도 쉬었다 간다했다.

 그 장교는 서울을 해방시키고 오는 길인데 서울에서 고려대학생을 붙들고「동무 독보회가 무엇인지 아오?」물었더니「대학생이 독보회도 모르더라」나는 아마도 서울에「고려대학」이 있는가 보다고 알게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서울에 어떤 대학이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고 알 길도 없었다. 독보회는 점심시간 또는 휴식시간에 모두 모아놓고「노동신문」이나「김일성 연설문」등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말하는데 남한에 그런 제도가 없으니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도대는 공비토벌의 길에

 9.28 서울수복에 이어 북한에 국군이 들어갔고 나도 공비토벌 한다고 금화의 북쪽인 금성 방면에 약 30名의 학도대원들이 갔다. 그 날도 치안대(경찰서내에 설치)에서 자고 떠나기 직전 집에 들려서 어머님께 금성쪽으로 공비토벌 가는데 같이 간다고 인사드렸다. 어머니는 집에 있는 콩고물의 찰떡을 급히 구워서 먹고 가라 하셨다. 아버지도 그렇지만 어머니는 16年의 斷産 끝에 얻은 아들이라고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

 부엌에 서서 몇 개 먹고 떠났는데 그것이 어머니가 주시는 마지막 음식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그 날 금성에서 일을 마치고 그곳을 떠나서 학도대 본부인 김화시내 경찰서로 귀대 도중이었다.

 시내로 학도대가 3열종대로 행진해 오는데 이상하리만치 시내가 조용했고, 저녁때인데 집집 굴뚝에서 밥짓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우리들은 이상하게 조용한 분위기에 긴장하면서도 큰소리로 군가를 외치기 시작했다.

 국군점령지역인줄 알고 군가부르다 기관총 세례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더욱 큰 목소리로 군가를 부를 때 난데없이 우리 숙소인 치안대 본부쪽으로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나왔다.

 우리들은 아마도 우리를 인민군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하면서 다 같이「학도대!」「학도대!」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앞서보낸 척후병 2명은 소식이 없고 기관총 소리가 더욱 요란했다. 날은 어둑어둑해졌고,「우리를 인민군으로 아는 모양이니 생창리 다리 너머 가서 자고 내일 시내로 들어가자」하며 철수했다.

 그 지점이 나의 집과는 불과 300m 이내로 지척이었는데 그것이 부모님 계신 곳을 먼 발치에서 바라본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생각을 못했다. 다음날 아침에 척후병이 다녀와서 하는 말이 金策 부수상이 이끄는 인민군 패잔병이 시내를 어제 완전 점령했고 시내에서는「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하는 인민군 노래를 부르며 트럭이 질주하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인민군 패잔병이 이미 금화시내를 점령하고 있었고, 후문에 의하면 척후병으로 나간 김형기 군 등 2명은 체포되어 즉시 총살당했다고 한다. 우리 학도대 일행은 남한에서 올라온 방위군 소위의 지휘로 산 능선을 타고 남한으로 향했다.

 마을이름도 기억 안나지만 한곳에서는 한밤중에 비상소집해서 나가보니 산 속의 민가에 인민군이 들어있으니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공격하기로 하고 산 속에서 포위하고 있었는데 새벽 동틀 무렵 잠복중인 학도대 쪽으로 예광탄이 2∼3발 날아오더니 집중 사격을 받았다.

 거꾸로 우리가 포위되어 있었다. 허겁지겁, 소대는 풍비박산이 되었고, 도주하는 바람에 박격포의 포신과 포탄 갖은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떨어져서 박격포는 땅에 묻고 남쪽으로 산능성을 따라 걸었다. 때로는 점심을 얻어먹으러 들어간 집에 조금전에 산속에 있는 인민군이 300명분을 주문해 놓았다하여 서둘러 그 마을을 피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인민군 포위하고 있는데 알고보니 우리가 포위되고 있어

 이틀 후에 도착한 곳이 경기도 포천여자중학교 교사였다. 김화에서 피난온 피난민수용소가 되어 있었으며 한 교실에 200여명이 먹고 자고 하였다. 45일간의 피난민수용소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하루 주먹밥 3개인데, 주먹밥 크기는 주먹의 반쯤 큰 것을 소금물로 쥐었으므로 찝찔했다. 물도 구해먹기 힘들었으므로 화장실 갈일도 별로 없었다. 때로는 15일간 용변을 보지 못했다. 먹은게 없으므로...

 그런 가운데 학도대는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하여 학교 운동장에서 제식 훈련은 하였다. 내가 대장이 되어「차렷!」「앞으로 갓」「번호붙여 갓」「뒤로돌아이 갓, 도라이 갓, 도라이 갓」세 번만 하면 대운들이 비실비실 쓰러졌다. 먹은 것 없고 기운이 없어서 비실비실 했다. 그러나 매일 아침 강변까지 뛰어가서 갯물에 세수하고 돌아오는 것이 반복되었다.

 40여일이 지난 후 아침에 훈련한 학생과 방안에서 쉬고 있었던 학생과 비교해 보면 혈색이 완전히 달랐다. 한쪽은 얼굴은 말랐으나 혈색이 좋았고, 한쪽은 귀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때 중공군의 대거 참전소식으로 우리들은「잠시 서울에 가야하며, 서울에 잠시 있다가 다시 고향으로 갈 수 있다」는 피난민 총인솔 책임자인 신기초 대장의 설명을 듣고, 모두가 서울로 향했다. 서울로 걸어오는 도중 미군들의 도로 확장과 포장공사 하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느꼈다.

 이북에서의 도로공사는 수백명이 지게와 삽, 괭이, 들것으로 하는데 미군 서너명이 트럭으로 자갈을 쭉 뿌리고 불도자, 땅을 다지는 롤러차로 덜덜덜 하면 다 끝내는게 아닌가? 서울에서 내가 배치된 곳은 청량리사범학교 자리였다. 교문을 들어설 때 보니「주번사관」「주번사령」같은 완장을 두른 군인들이 눈에 띠었다.

 서울 비원에서 제2국민병 대열에 끼어 50년 12월 18일 출발

 약1주일이 지나서 때마침 내가 불침번을 서고 있을 때「남쪽으로 먼저 갈 사람 3명만 차출하라」는 명을 받아 나와 앞뒤 불침번 3명이 다음날 아침 선발되어 간 곳이 창경원 옆의「비원」숲속이었다.

 서울 각지에서 모여든 제이국민병 수천명이 모인 것 같았다. 학생들도 더러 있었으나 대부분이 미제군복도 입고 건장했으며, 배낭들을 지고 있었다. 방위군 장교가 나와서「이중에 구령 붙일 수 있는자 나오라」하여 나갔더니 이 대열을 움직여보라 하여 학도대 훈련시킨 경험으로「차렷!」「우향웃」「앞으로 갓」「뒤로돌아 갓」몇번 했더니 18부대 3대대 9중대 1소대장을 하라했다. 그것이 1950년 12월 17일부터 서울에서 떠나는데 우리가 출발하는 날이 18일이므로 18부대라 했다.

 명에 따라 모든 대원들의 제2국민병 등록증을 회수하고 보니까 이북에서 온 나나, 서울사람이나 신분증 없기는 똑같았다. 비원을 떠나 제2국민병의 피난대열에 참여했으며 경기도 양주에서 첫밤을 지냈다. 겨울 날씨에 북한강변의 찬바람은 매서웠다.

 민가에서 저녁으로 주먹밥을 먹고 양주 방위군 사령부에 갔다. 장작불 난로를 피우고 있던 방윅누 장교가「너 몇 살이냐?」「열일곱입니다」「내동생과 같구나」「배고프지」「네」「네방에 몇 명이냐?」「19명인데요」「19개 가져라!」우리 먹은 밥의 3배만큼 큰 주먹밥을 얻어다 숙소식구들에게 나눠주니 모두가 즐거워했다.

 양평을 떠나 여주, 장호원, 문경새재, 상주를 거쳐 대구밑의 경산까지 매일 100리 내지 120리씩 13일간을 걸었다. 매일 걸으니 발이 퉁퉁 부었고, 잠잘 때 발을 높이 고이고 자면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수안보를 지나 문경새재를 넘을 때는 폭설이 펑펑 쏟아졌다. 산 중턱에서 미군들이 도로 확장 공사를 열심히 하는 것을 보았다. 암반을 뚫는 소리 불도자의 덜커덩 소리가 요란했으며, 산에서 내리막에서는 눈 쌓인 언덕을 즐거운 기분으로 미끄럼 타며 내려왔다.

 매일 1백여리씩 13일간 행군 양평→여주→장호원→문경→상주…대구까지

 걷는 도중 도로양변에 많은 장사꾼이 있었고 때로는 땅콩을 큰 가마니에 한가마씩 파는 곳을 지날 때「맛좀봅시다」하며 집어가는 사람을 보고 나도「맛좀봅시다」하며 몇 번 주머니에 집어 넣었더니 주머니가 두둑하였었다. 문경새재의 숙소에서 두사람이 따로나가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동태를 사다 밥해 먹으면서 나를 끼워준 것이다. 그때 고마운 마음 표할길 없었다. 그 때 또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아주머니 살팔아다 밥좀 해주세요」하는 소리 듣고 쌀을 사와야지 팔아오라는게 무슨 뜻인가 하였다. 또 한번은 상주를 지날 때 연세가 드신 한분이「곶감」을 한접 사서 나를 한꼬치(10개) 주며「이것 먹으면 배가 든든하니 먹어둬라」하셨다.

 소대장이라 하며 젊은 학생이 밥구하러 뛰어다니고, 심부름 잘 해주고 하는 것이 보기가 기특해서 생각해 주신 것 같아 고마웠다.

 경산까지는 잘 왔는데 이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만18세부터 35세 미만은 신체검사 받고 그 외에는 마산까지 걸어가야 된다 하였다.

 나는 신체검사도 안받고 신체검사 끝나고 서 있는 줄 맨 앞에 섰다. 김화에서 포천, 포천에서 서울, 서울에서 경산까지 왔는데 여기서 또 마산까지 걸어갈 생각이 아득하였기 때문이다. 키도 크고해서 신체검사 마치고 서있는 사람들 맨 앞에 섰다.「이 줄은 뭐야?」군인이 물었다. 나는「갑종합격입니다」하였더니 그래「앞으로 갓」해서 겨울 추운 밤중에 경산에서 대구까지 걸어와서 대구 육군 훈련소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그날이 1950년 12월 30일이었다. 군복으로 갈아입고 담요도 지급받았다. 군번도 받았다. 0180826이었다.

 담요와 따뜻한 콩나물국 준 육군훈련소

 그간 입고 있던 옷은 10월부터 입던 고등학교 교복에 어머님이 양털실로 떠주신 상하 양털 셔츠였다. 아무리 양털 셔츠라도 근 3개월 세탁도 안하고, 이, 벼룩 등 전염병 예방을 위해 미군들이 밀가루 같은 DDT 약을 콤프렛샤로 머리와 옷 속에 팍팍 뿌려 댔으므로 푸대처럼 뻣뻣했었다.

 군에서 주는 솜누비옷은 따뜻했고, 콩나물국에 안남미밥은 뜻뜻하였고 살 것만 같았다. 피난민 수용소의 한방에 200여명씩 자는 숙소나 주먹밥에 비하면 낙원이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밤에 도망병이 생기지 않도록 날카롭게 신경쓰는 것 같았다. 화장실 갈 때는 누비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엷은 옷만으로는 12월 추위에 도망 못가기 때문인 것 같았다.

 훈련을 마치고 그 자리가 보충대가 되었는데 배가 고파서 일선에서 보충병 뽑으러 오면 제가끔 먼저 가겠다고 손들었다. 죽는 것은 그 다음이고 우선은 일선가면 밥은 많이 준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이상 재학자, 졸업자 손들어!」가보니 한국군 1개 중대가 편성되어 미군트럭 5대에 분승하여 상주에서 일박하고, 강원도 회양여자중학교 교사자리로 갔다. 연대장인 미군 육군 대령이 환영인사를 했다. 우리 중대는「미2사단 38연대 Rock Ranger Company」였다.

 약 한달간 주야로 맹훈련이 계속되는 유격훈련이었다. 사복으로 변장하고 적진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고,「경기관총」실탄을 어깨에 감고 혼자서 기관총을 휘두르는가 하면「화염방사기」로 터널 속을 불바다 만드는 등의 사격훈련이었다. 하루는「머리와 손톱을 잘라서 주소성명을 써주면 절에서 불공드려준다」고도 했다. 죽은 뒤 명복 빌어준다는 이야기다.

 한번은 내가 경기관총 사수를 할 때 민가에 잠복한 인문군을 잡기위해 그 초가집에 경기관총으로 불을 붙였다. 연기 속에서 흰옷 입은 사람이 튀어나와 나는 경기관총을 난사했다. 넘어졌나 싶은데 다시 일어나 뛰는 것을 잠복했던 소대원이 잡고 보니 그 집 주인이었으며 머리에 쓴 수건에 구멍이 났는데 부상이 없었다.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내가 사격 명수라고 생각했었는데 총탄이 피해간 것을 감사했다.

 우리 소대는 강원도 춘천지구 가리산에서 인민군 진지와 미군 진지 사이에 배치되어 척후 활동을 전개했다. 미군은 우리 주둔지역 주변을 밤에는 포사격으로 엄호해 주었다. 하루는 아군 척후병의 교전중이라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서 전투 준비했다. 나는 엠원총과 실탄 약 300발을 전신에 감고 나갔다.

 산 능선을 걸으면서 문득 뇌리에 스쳐가는 생각이 만약에 승현형이 인민군으로 끌려나와 저곳에 엎드려서 나를 겨냥하고 있으면「내가 쏘아야하나」「말아야 하나」하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인민군들이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윗도리도 못 입고 튀어서 산 능선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인민군이 피우던 담배꽁초에서 연기가 아직도 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방금 떠났다.

 만약에 우리 형님이 인민군으로 대치중이라면?…

 갑자기「따따따따...」「따콩따콩」적군이 일제히 사격을 가해왔고, 나는 그 자리에 엎드려서 엠원총을 응사했다. 1시간 이상 정신없이 사격하다보니 소총은 총열이 달아서 나무뚜껑이 타고, 연기로 앞이 안보였다.

 잠시 연기 가시기를 기다리는 사이 적의 총탄이 주변에서 먼지를 풀석풀석 내면서 쏟아졌다. 나에 대한 집중사격임이 분명했다. 나는 1m쯤 언덕밑에 미끄러져 내려왔다가 총열이 식고 연기가 가셔서 다시 기어올라와서 사격을 개시했다. 실탄이 거의 다 떨어질만 할 때였다.

 또 총 열이 달아올라 나무덮개가 타서 연기로 앞이 안보여 잠시 머문 사이「따르륵」소리와 함께 왼쪽 어깨에 도끼로 후려치는 것 같은 통증이 왔다. 왼쪽어깨와 뒷잔등 척추에 두발을 맞았는데 어깨의 통증만이 심하게 아팠다.

 총에 맞으면 의례히 죽는 것으로 알았지 다시 사는 것은 몰랐다

「아! 나는 죽었구나, 죽을 때엔 이렇게 아픈거구나!」고 생각했다. 비탈진 산에서 왼쪽어깨에 총알을 맞게 되니 왼쪽으로 몸이 뒤틀리고 데굴데굴 구르다가 불에 타다 남은 나무그루턱에 걸려서 더 구르지 않았다. 그 산은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모든 나무는 불타없어졌고 불타다 남은 나무 그루터기 뿐이었다.

 두바퀴 구르다가 멎어서 산밑을 내려다보니 절벽으로 시커먼 바위뿐이고 한바퀴만 더 굴렀으면 낭떠러지 절벽 밑에 떨어져서 시체나마 찾으려해도 아무도 올 수 없을 것 같은 험난한 골짜기였다.

 내가 총에 맞아 구르는 것을 조금 후방에서 본 이종국 일병이「용만이 총맞았다」하며, 뛰어와서「어깨에 맞았다. 겨드랑이에 실탄이 보인다」하며 칼로 옷을 째고 압박대를 처매주려 할 때였다.

 인민군들이 다시 따발총을 난사하여 주변에서 먼지가 펄석펄석 나니 이종국 일병은 얼른 손을 놓고 뒤고 피신했다. 그런데 나는 그 자리에 서서「나는 죽었으니 빨리 피신하라」고 소리쳤다. 죽었는데 무엇이 무서운가 하는 생각 때문에 그 자리에 서서 피신할 생각을 안했었다.

 그 때에 맨앞 선두의 김창조 소대장은 산밑에서 정상을 향해 사격하다가 내가 총에 맞고 그대로 서있는 것을 보고 달려와서 나의 바른 팔을 어깨에 메고「임마! 총한발 맞고 뭘 그래! 나는 여덟발 맞고도 살았는데..」하며 고개넘어 후미진 곳에 피신시켰다.

 그날이 1951년 5월 11일이며「나는 죽었고」「나는 다시 살아났다.」

 2인용 개인천막에서 항상 같이 지내는 전우 이언상 일병은 매일밤 자기 전에 성경을 읽었고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을 불렀다. 기도 중에는 나에 대한 기도가 빠지지 않았으며,「전쟁 끝나면 가족들과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 때에는 나는 하나님을 전혀모를 때였으므로 이언상 전우의 찬송과 기도를 비아냥 거렸다. 예를 들면 찬송가 중에「몇일후 몇일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하면 나는「몇일후 몇일후 깜장 콩알 먹고 죽으리...」했다.

 어머님과 형제는 미군의 폭격으로, 나는 인민군 총탄에

 그런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왼쪽 어깨에 맞은 총탄이 20㎝만 옮겼어도 심장에 맞았을 것이고 척추의 총탄이 10㎝만 밑으로 맞았어도 얼굴에 명중하였을 것인데 실탄 2발이 모두 급소를 피해준 것이 이언상 전우의 간절한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6·25전쟁은 우리 가족을 미군과 북한 인민군 양쪽의 공격을 받게 했다. 부모님과 가족들은 공비토벌하겠다고 김화 북쪽인 금성방면으로 간 나의 귀가를 기다리느라 피난길에 오르짐  하고 방공호 속에 숨어 있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노력동원에 차출되어 금화 옆산의 터널공사장에 동원되어 있을 때 B-29라고 생각되는 대형 미군폭격기가 금화 시내를 융단폭격 했다. 아버님은 가족들이 있는 방공호 쪽에 폭탄이 떨어진 것으로 보여서 폭격 후 서둘러 와보니 방공호가 없어졌다. 괭이로 근처를 파헤칠 때 어머님 시체가 나오고 조금 후에 동생 시체가 나오고, 그런데 방공호에 있어야 할 형이 안보였다. 담배한대 피우시고 다시 파보니 척추가 부러진 형이 나왔다.

 22세로 젊어서 숨이 살아 있었나 보다. 그 후 목격자에 의하면 승현형은 꼽추처럼 되어 기어다니는 형상이었다 한다. 나는 인민군 총탄으로 뒹굴었고 가족들은 미군 폭격기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6·25전쟁을 두고 흔히들 민족적 비극이라 하지만 나는 너무나 막연하고 남의 일같이 느꼈었는데 우리가족이 당한 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나의 가족의 처참한 비극」이었다.

 나는 6·25를 모르는 젊은 세대가 이러한 참상의 한 예를 보고 북한 공산군이 어떠한 만행을 저질렀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가 하는 실상을 알게 하여 주고 싶다. 특히 근래「북침」운운하는 한심한 사람들에게 말이다.

 척추에 남아있는 실탄 한발 뽑아 딸 시집갈 때 목걸이 해주려 했다

 1951년 5월 11일 북한 인민군에 맞은 두발의 따발총탄 중 어깨에 맞은 한발은 관통을 못하고 겨드랑이에서 수술해서 빼어냈으나 척추 가운데 박힌 실탄은 아직도 제거하지 못한채 남아서 나의 신체의 일부분이 되어있다. 처음 부상당했을 때 미군 야전병원의 미군의사들도 수술이 부담스러워 뒤로 미루었나보다. 척추신경에 붙어있어서 제거하기에는 예상되는 부작용의 부담이 너무 컸던 것도 같다.

 1993년 뉴욕병원에서 제거를 시도했을 때도 3달러만 내면 빼주겠다.「그런데 수술 후 아프지 않다는 보장은 못하겠다」해서 거절했다. 서울대학병원 최길수 신경외과 과장은 약 10일정도 입원하면서 수술해 보자하는데 항상 아픈 것도 아니고 아플 때는 당장 수술하려 했다가, 고통이 없을 때는 만에하나 잘못되어서 신경 건드리면 하반신이 마비된다는 말에 수술을 피하였다.

 문제는 신체검사로 X-Ray 찍을 때마다 의사는 난감한 얼굴로 조용히 와서「X-Ray 다시 한번 찍어야 되겠는데요」한다.

 척추에 이상한 물질이 있고, 큰병이 있나 하는 걱정어린 표정들이다. 재정차관보 때 어떤 월간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내 몸에 있는 따발총실찬이 원형대로 이쁘게 박혀있으므로 이 다음에 빼내서 막내딸 시집갈 때 목걸이 해주겠다」했더니 그대로 보도되기도 하였다.

 그날 전투는 미군과 합동작전이었다. 나를 포함한 부상자가 나오고 전투가 치열해 지니까 고문관(미군소령)이 무전연락을 한 후 우리를 한발 물러서게 하였다. 제트기가 와서 기관포와 네이팜탄으로 山 전체를 불바다를 만들었다. 나는 미군 위생병 4명의 들것에 실려 험난한 산과 계곡을 내려왔다.

 험한산과 계곡을 들것으로 내려다 준 미군 위생병에 감사

 급경사지에서는 미군 위생병들도 도저히 들고 올라갈 수 없으므로 내가 기어서 올라갔고, 완만한 곳에서는 들것에 다시 드러누웠다. 위생병은 운송도중에도 궁둥이에「페니실린」주사도 놓아주고 물도 먹여주었다.

 지금도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되어 땀 흘리며 나를 들고 쩔쩔매며 내려오던 미군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분들이 산밑에 대기중인 짚차까지 운반해준 덕으로 나는 야전병원에서 수술 받고 살아날 수 있었다.

 1951년 5월 11일 강원도 춘천지구「가리산」천투에서 낮선나라에 와서 낮선나라의 군인인 나를 아주 어렵게 산밑에까지 땀흘리며 들어다 준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 미군병사들게 깊이 감사한다. 혹시라도 찾을 수 있으면 한국에 초대해서 변화된 한국을 보여주고 싶다.(한국논단 6월호)

 이용만(전 재무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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