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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특집③] 전쟁과 음모론과 실제

조회 수 2038 추천 수 0 2009.06.22 09:28:24
국정협 *.253.32.253
전우들 피바다, 洛東江 전투..'6·25 북침설'을 믿으려 하는 소위 진보성향의 좌익 386세대들을 보면 가슴에 열불이 날 지경이다
  전쟁은 실제로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군인들은 그 내막을 잘 모른다. 그저 상부의 명령이 있으니 총과 대포를 쏘고 있을 뿐이다. 전쟁을 벌이는 진짜 동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당사국의 대통령이나 수상 장관 등 고위층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일찍이 프로이센의 장군인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고 갈파한 적이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12살 때 군대에 들어가 51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39년간이나 군인의 삶을 살면서 7번이나 전쟁에 참전한 타고 난 군인이자 군사이론에 해박한 전문가다. 그의 주저인 '전쟁론'은 시대를 초월한 군사이론의 불멸의 고전으로 지금도 세계 각국의 군 고위층들 사이에 애독되고 있는 군사고전이다.

 ▲ 백선엽 장군이 발행한 명예제대증

 진주만 기습과 6·25남침의 공통점

 그의 말대로 정치의 연장선상에서 필자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의 불씨를 당긴 1941년 12월 7일의 眞珠灣 공격과 북한이 1950년 6월 25일에 저지른 6·25남침이 우연의 일치이긴 하지만 서로 기막히게 닮았다는 점에 대해서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다.

 첫째, 두 전쟁이 모두 예고없는 기습침공으로 시작됐으며 일요일을 택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일요일이여서 진주만에 주둔한 미 태평양함대사령부의 예하장병들은 모두 외출허가를 받아 영외로 빠져나갔거나 댄스파티 등으로 마음 편한 주말을 즐기고 있었던 시점이다.

 북한의 6·25남침 역시 일요일에 감행되었다. 전방부대의 경계태세도 크게 이완된 상태인 데다 장병들에게 농번기 휴가를 대폭 실시하던 중이었다. 게다가 육군 본부에서는 (진주만의 미 해군들처럼) 하필 6·25 전야에 댄스파티가 열려서 전쟁이 시작된 날까지도 고위 장교들이 술에 취한 상태였다고 후일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본이 예고도 없이 하와이를 기습침공하고 나서 뒤늦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북한이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 남침한 것도 유사하다.

 일본의 침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될 당시의 세계정세는 어떠했는가.

 미국과 영국 등 제국세력에 대항해 결성된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3국 군사동맹)의 하나였던 일본은 1940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경제 봉쇄정책에 대한 대응책으로 미국과 협상을 벌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협상이 실패했을 경우에는 미국의 태평양함대를 분쇄한다는 전쟁시나리오까지 준비하는 등 양면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결국 협상이 결렬되자 예정대로 진주만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미국에 의한 이른바 '전쟁음모론'이다.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의 동참을 권고하는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국도 동참하기 위한 명분을 쌓으려고 일본의 선제공격기미를 알면서도 오히려 공격을 유도했다는 설이다. 이 음모론을 강력 뒷받침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일본이 침공했을 당시 진주만에는 항공모함이 단 한 척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미군의 즉각개입은 병주고 약주는 식의 전략·전술의 일환

 아리조나호 등 전역을 앞둔 구형 전함들만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쾌재를 불렀을 만큼의 큰 손해는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경제공황 뒤끝이라 미국으로서는 군수산업을 일으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과 연관시켜 보면 설득력이 있는 얘기다. 사실상 진주만의 상처를 빌미로 미국의 2차대전 참전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동시에 군수산업의 활발한 진척으로 미국경제는 다시 호황을 만난 것이 사실이다.

 논자들 중에는 한국전쟁(6·25)도 그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시 외세(미국)에 의한 '음모론'의 범주에 속하는 하나의 '가설'이긴 하다. 물론 6·25는 북한의 김일성이 구상한 전쟁시나리오에 의해 감행된 '남침'전쟁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1950년 1월 소련의 스탈린을 만나서 '남한해방' 전쟁을 소비에트가 지원해달라고 설득시킨 것이 주효해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전쟁이다.

 그렇긴 하지만 적어도 미국에게도 전쟁의 환경을 제공한 책임의 일단이 없지 않다는 얘기에 동조하는 학자들도 적지않은 것이다.

 그 하나가 한국정부가 수립된해(1948년) 9월 15일부터 주한미군의 철수가 시작되어 1949년에 철수가 완료됨으로써 당시 국군이 완전히 자리도 잡기전에 남한에는 군사적 공백상태가 생긴 것이다. 이 절호의 기회를 김일성 집단이 놓칠 리가 없다. 미국이 행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실수는 1950년 1월에 '한반도는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된다'고 한 이른바 '애치슨 라인'이 공표된 사실이다. 북한이 대남 해방전쟁을 벌일 경우 미군의 참전을 우려해서 스탈린이 김일성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있다가 애치슨라인이 발표되자 김일성은 바로 이 애치슨 라인을 근거로 "미군은 참전 안 할 것이다"라고 스탈린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따지고 본다면 6·25는 북한의 남침으로 빚어진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미국이 그런 환경을 조성하는 데 한 목을 했다는 일부의 주장을 전적으로 묵살할 수만은 없는 셈이다.

 6·25 전쟁이 실제로 발발하자 미국은 즉각 미군을 참전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병주고 약도주는' 식의 전략 전술에 지나지 않는다.

 민족 최대의 비극, 6·25는 이제 잊혀진 전쟁이 되었는가.

 나는 기묘하게 6·25에 참전했다

 북한 공산주의의 적화통일 야욕이 빚은 이 무모한 전쟁으로 남북을 합쳐 자그마치 450만 명이 숨지고 1천만 이산가족을 만들어낸, 일찍이 인류사에 유래가 없는 처절한 동족살륙의 전쟁을 단지 흘러간 과거사의 한 페이지로만 흘려버릴 것인가. 지하에 잠들어 있는 호국 영령과 전쟁희생자유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6·25 한국전쟁에 참으로 기묘하게 참전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일요일) 아침 10시쯤 대동청년단에서 왔다는 한 청년이 나의 형님인 지용순을 찾는다. 형님은 마침 출타하고 집에 없었다. 그 사람은 들어오는 대로 청년단 사무실로 나오라고 전하라면서 일단 돌아갔다.

 당시 우리는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살고 있었다. 그 날 동네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38선일대에서 남북간에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처음엔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한 38선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국지적 충돌정도로 생각했다. 북한의 전면남침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한 시간쯤 후에 그 사람이 다시 왔다. 아직도 귀가 안 했다고 했더니 그럼 동생이라도 대신 왔다 가라는 것이다. 나는 별다른 의심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수원서 탱크폭파 특공대 자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대동청년단 사무실에 가보니 비상소집된 청년단원들과 나처럼 대리로 나온 또래급 학생들로 북새통이었다. 그때부터 아예 문도 잠가 버린 채 화장실 가는데도 사람이 따라 다닌다. 행동의 자유가 완전히 유보되었다. 항의를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금 북한의 인민군(북한군의 속칭)이 38선 전역에서 남침해 내려오고 있으니 여러분들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서울을 사수해야 한다"는 상황설명이 전부였다.

 점심도 굶은 채 우리는 서대문쪽으로 행진해 갔다. 영천(독립문)쪽에서도 수백 명이 대오를 지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합쳐진 인파가 모두 6,7백 명은 되었다. 나는 나의 요구가 묵살될 줄 뻔히 알면서도 내일 학교에 가야 하니 집에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나는 선린상업 5학년(당시 학제)에 재학 중이었다.

 "전쟁이 났는데 무슨 놈의 학교냐"며 면박만 돌아왔다. 간간이 부슬비가 내리면서 어둠에 싸인 25일 밤, 우리는 계동 휘문중학교 강당에 일단 잠정 수용되었다. 그날 밤은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다음날(26일) 아침 우리는 종로5가 쪽으로 행군해서 어느 트럭정비공장 안으로, 흡사 서부영화에 나오는 소떼마냥 밀려서 쳐 넣어 졌다. 잠수 후 3대의 대형트럭이 군복을 잔뜩 싣고 와서 부린다. 각자 맞는 치수대로 군복을 입고 졸지에 계급도 없는 군인이 된 것이다. 우리는 도보로 서울역까지 가서 대기중이던 기차(지붕이 없는 無蓋車)에 실려졌다. 그것이 가족과의 기약도 없는 이별의 시작읻.

 우리를 태운 열차는 수원역에서 멎었다. 초등학교를 전시징발한 임시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이 시작되었다. 신병훈련이래야 소총도 실탄도 지급되지 않은채 맨몸으로 하는 제식훈련에 불과했다. 이날 몇 끼를 굶은 신병들에게 지급된 식사는 설익은 보리밥과 소금국에 가까운 시금치국이다. 그것을 먹고 배탈이 난 훈련병들로 화장실에서 요란한 '설사혼성곡'(?)이 울려 퍼진 장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27일 낮에는 전 훈련병을 연병장에 모아 놓고 상부의 긴급명령을 하달한다.

 북한의 기갑부대(탱크)를 쳐부술 육탄특공대를 조직하는데 자원용사를 뽑는다는 것이다. 그 내용인즉 전율을 금치 못하게 했다. 북한군의 탱크가 내려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폭탄을 들고 몸으로 부딛쳐 폭파시키는 자살특공대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얼핏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의 '가미카제 특공대'가 연상되었다. 처음엔 서로 눈치만 볼뿐 선뜻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하고 또 한 친구가 거의 동시에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망설이고 있던 17,8명이 우루루 따라서 자원했다. 그렇게 해서 20명으로 급조된 육탄특공대가 탄생했다. 그러나 북한 인민군의 서울입성과 한강 도강작전이 앞당겨져 포성이 점점 가까워지는 긴박한 상황을 맞아 전원철수명령이 내리면서 모처럼 조직한 자살 특공대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야크機의 공습

 전쟁 5일째인 29일엔 벌써 포성이 수원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한강철교 폭파(28일 새벽)로 잠시 주춤했던 인민군 기갑부대가 이미 강을 건너 밀고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다급해진 신병 훈련소에도 부대이동 명령이 떨어졌다. '인간폭탄'으로 탄생한 육탄특공대는 단 한번도 써보지 못한 채 별수 없이 후퇴대열에 합류했다.

 신병들은 부대에서 나누어 준 누비이불만 한 장씩 짊어진 채 또 다시 석탄을 실어날으던 화물열차에 올라탔다. 기차가 조치원 역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갑자기 하늘에 전투기 2대가 나타났다. 기체모양이 아무래도 낯이 설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아군 비행기다" 소리쳤다.

 도망병들의 최후

 후퇴열차는 대전까지 내려갔다. 대전에서 우리는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7월 초순엔 미군이 참전하면서 성능 좋은 M-1 소총을 수 십대의 GMC 트럭이 싣고 와서 한국군에게도 전량 지급되었다. 낮에는 강도 높은 전투 훈련이 계속되고, 저녁에는 M-1 소총의 분해 결합법을 반복해서 익혔다. 훈련의 성과는 단시일 내에 나타나 사격성적도 좋아져 제법 군인다운 모습으로 변모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신병들의 사기에 찬 물을 끼얹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신병 두명이 고된 훈련과 전쟁에 대한 공포감을 못 이겨 병영을 탈출하는 도망병 사건이 빚어진 것이다. 부대사령관은 이 사건을 중시, 전 방위로 그들을 추적한 끝에 두명의 도망병을 모두 붙잡아 들였다.

 이튿날 우리는 끔찍한 장면을 보아야 했다. 야전훈련장으로 두 도망병을 끌고 가서 감나무에 묶어 놓고 전 사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즉결처분(총살)을 집행한 것이다. 전시 하에서의 도망병은 또 다른 도망병의 재발을 막기 위해 즉결처분하는 것이 지휘관의 고유권한인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훈련을 받은 두 젊은이는 그렇게 덧없이 비명에 갔다. 새삼 전쟁의 비정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사격술과 지형지물 이용법, 수류탄 투척법, 야간 행군 등의 기본훈련만 받은 우리는 한 밤중에 어디론가 급히 이동해 갔다. 물론, 목적지는 고사하고 작전내용도 알려주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산을 몇 개씩이나 넘으며 밤을 새워 행군했다. 새벽녘에 도착한 곳은 경상북도 의성지구의 표고 400m쯤 되는 야산의 한 고지였다. 그 곳에 우리는 진을 쳤다. 적은 바로 산아래 포진하고 있었다. 피아간의 거리는 700m도 채 안됐다.

 M-1 소총과 수십발씩은 彈띠를 어깨에 두르고 박격포탄 까지 3발씩 나누어 짊어진 몸으로 50여리 길을 야간행군 해온 신병들에겐 피로가 엄습해 왔다. 그런데 "전투가 곧 벌어질지 모르니 잠들지 말고 전방을 주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 말이 현실로 나타났다. 동이 트기 직전, 요란한 폭음이 이 새벽의 정적을 깨뜨렸다. 적 진지로부터 맹렬한 박격포 공격이 가해진 것이다. 일부는 머리위로 날아갔지만 일부는 우리 진지 근처에 떨어지면서 파편에 부상자가 속출한다. 난생 처음 전쟁을 겪어보는 신병들이라 처음에는 공포에 질려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전우들 쓰러지자 용감해진 신병들

 그러나 고락을 함께 해온 전우들이 이곳저곳서 쓰러져 숨지고 중상을 입는 처절한 현장을 목격하면서부터 신병들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란 식으로 용감해지기 시작했다. M-1 소총과 수냉식 기관총을 포함한 우리 측 자동화기들이 일제히 불을 뿜어댔다. 그 보다도 우리측의 잘 계산된 박격포 공격이 위력을 발휘해서 쓰러지는 적들을 보면서 사기가 충천해 가기 시작했다. 야간행군 때 신병들이 힘겹게 등에 짊어지고 산을 넘으면서 투덜대던 박격포탄이 적을 제압하는 데 그처럼 일등공신이 될줄은 미처 몰랐다. 전투는 다음날 낮까지 계속되었다.

 의성의 산들에는 수목이 울창했는데 쌍방간에 박격포탄을 얼마나 많이 퍼부어 댔는지 여러 곳에 산불이 났을 정도다. 의성에서의 첫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400, 500m를 전진했으나 수 십구의 시신만 남긴채 북한군은 퇴각하고 없었다. 산불이 난 곳에는 까맣게 타버린 인민군의 시신들이 여기 저기 나딩굴고 있었다. 물론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틀간의 전투에서 20명 이상이 전사하고 60명이 넘는 중·경상자를 냈다.

 그날 우리는 악취가 풍기는, 타버린 시체 옆에서 KSC(전선에 밥을 날러다 주는 짐꾼)가 날러다 준 주먹밥을 먹었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은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던 우리에겐 마실 물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갈증을 참지 못한 나머지 몇몇 동료 사병들은 자신이 누은 오줌을 받아 마시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피바다, 洛東江 전투

 대전에서 훈련받은 신병들은 7월 하순께 군 편제개편에 따라 수도사단(사단장 金錫源준장)에 배속되었다. 나는 수도사단 1연대 1대대 소속이어서 작전시에도 제일 먼저 행동하고 대열의 선두에 서는 소총수 여서 위험부담이 더 컸다. 전투경험이 없는 신병들이 의성지구에서 예상외로 잘 버텨준 것은 이곳을 돌파해서 永川으로 진격하려던 인민군 12사단의 침공계획을 무위로 돌아가게 했다는 데에 전술적 의의가 컸다.

 의성전투를 끝낸 우리 부대는 8월초에 다시 전선으로 이동해 갔다. 전세가 불리해진 격전지로 투입된다는 것이다. 신병들은 찌는 삼복더위 속에서 땀을 많이 흘리면서 여러 날을 악전고투해온 데다 먹는 것이 고작 주먹밥이어서 거의 대부분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

 허기를 참지 못한 일부 병사들은 행군도중에도 밭에 뛰어들어 설익은 참외랑 수박을 따서 대검으로 잘라먹는 일이 허다했다. 북한 인민군들의 사정은 더욱 딱했다. 보급로가 길어진 데다 UN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인민군들은 물자보급이 거의 차단된 상태였다. 어깨에 메고 있던 미숫가루로 식사를 대신하는 판이었다. 그들의 시신에선 어김없이 미숫가루 전대가 발견되었다.

 한국군 수도사단 병력이 새로 이동한 곳은 바로 6·25의 대 격전지인 낙동강이다. 그것도 피아의 전사자가 엄청났던 安康지구다. 우리는 산악을 등지고 적을 내려다보며 진을 쳤고, 북한군은 강변에 가까운 저지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병법상의 지형적 조건은 우리 쪽이 훨씬 유리한 편이었다. 한가지 흠이라면 안강의 산야는 나무나 바위가 거의 없는 민둥산이어서 몸을 숨기고 싸울 만한 地形地物이 전무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숲이 무성했던 의성지구와는 정반대의 산세였다. 자연 우리 부대 전모가 적의 총구 앞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8월 9일밤, 북한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동시에 낙동강 전 전선에서 일제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어둠을 뚫고 날아오는 총·포탄의 파열음이 귀창을 찢는 듯 했다. 우리도 있는 화력을 총동원해서 적진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말 없는 '전우들의 시체'

 신병들도 그동안 갈고 닦은 훈련을 실험해 보기라도 하듯 최대 사거리 3,200M의 M-1 소총을 총렬이 닳을 정도로 난사하고 있다. 하늘에는 예광탄이 유성처럼 흐르고 간간히 터지는 조명탄으로 인해 칠흑 같은 밤을 대낮처럼 밝혔다. 피아간에 사력을 다해 주고받는 공방전으로 인해 安康의 하늘엔 총탄이 비 오듯 했다. 전투는 소강상태를 모른채 밤을 새워 계속되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한밤에 폭우가 쏟아진다. 삽시간에 참호에 물이 차 올랐다. 우리는 진흙탕 속에서 사격을 계속해야 했다. 이런 것을 가르켜서 泥田鬪狗라 했던가?

 쉴새 없이 쏘아대는 총열에 빗물이 스며들면서 치익, 치익 소리가 난다. 뜨겁게 달아 오른 총열을 떠난 총탄은 제대로 유효사거리를 지키지 못하고 포물선을 그으며 도중에 떨어지는 판이다. 실탄도 거의 바닥이 나 간다.

 그런데 잠시 전까지 양옆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들이 말이 없다. 적탄을 맞고 전사한 것이다. 위생병들이 전사자들을 끌어가고 피와 진흙으로 범벅이 된 그들 참호에는 또 다른 신병들이 투입된다. 모든 참호들에서 그런 사태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 허무감은 무슨 말로도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전쟁의 비극인 것이다. 탄알이 떨어져서 죽은 전우가 쏘다 남은 실탄을 허는수 없이 가져다 쓴 나의 착잡한 심경은 아무도 알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기묘한 일은 10일 아침까지 대 격전을 치르고 살아 남은 신병들은 비록 몸은 지쳐있었으나 눈들은 모두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11, 12일에도 같은 규모의 전투가 되풀이 되었다. 적군은 한 낮에는 잠잠하다가도 야간과 새벽 사이에 맹공격을 퍼부었다. 낙동강 전 전선에 걸쳐서 북한군의 공격은 서남부 지역에서는 한밤중에 시작했고, 동북부지구에서는 저녁마다 공세를 취했다. 아군의 주간 폭격과 포격의 화력지원이 워낙 거세고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낮에는 대결을 피했던 것 같다.

 安康전투에서 부상을 입다

 북한군 제5사단과 12사단은 기계와 안강을 연결하는 낙동강 전선의 요충을 점령하려는 의도 아래 8월 대공세를 감행했다.

 8월 13일, 포항과 안강쪽으로 밀고 들어온 북한군 주력부대는 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 병력이 협동작전으로 악전고추 끝에 격퇴시켰다. 이날 전투는 대단히 격렬했다. 낙동강을 돌파하여 그 여세로 釜山까지 밀고 내려가 남조선을 해방시킨다는 金日成 총사령관의 작전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북한군이 총공세를 벌였던 것이다.

 밤새 세차게 내리던 비는 새벽녘에 이슬비로 바뀌었다. 동이 트자 갑자기 북한군들이 진지 밖으로 나와 일제히 아군고지를 향해 까맣게 기어오르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총공세가 개시된 것이 분명했다. 동시에 적의 포사격도 한층 맹렬해 졌다. 우리는 미구에 닥쳐올 백병전까지도 각오해야 했다.

 "마침내 내 목숨도 경각에 달리게 되었구나" 나는 살아 돌아갈 생각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다. 다행히 운이 좋아 지금까지 살아 있었지만 저 彈雨속에서 결국은 전사 아니면 중상으로 끝나게 될 것이라는 운명예측을 일찌감치 하고 있었다. 나는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는 적군을 향해 남은 실탄을 유감없이 소진하고 있었다. 내 허리춤에는 최후순간에 쓸 수류탄2발도 남아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묘한 것은 그런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문득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피난은 나왔는지, 혹여 공산당 치하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별 별 걱정을 다 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다. 내 옆구리가 화끈해 지는걸 느꼈다. 내려다보니 피가 콸콸 흐른다. "당했구나" "이것이 최후로구나" 생각하니 허무했다. 그러나 우선은 치명적인 상황인지 여부를 확인하고 싶었다. 옷을 헤치고 보니 우측 늑골 바로 아래 살점이 2,3㎝ 가량 떨어져 나간 것이다.

 경주 제3육군병원에서 치료받고 명예제대

 나는 결국 경주에 있던 제3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졸도하고 말았다. 많은 출혈을 한 탓이다.

 내가 깨어나 정신이 든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의 일이었다고 간호원이 귀띰해준다. 그곳서 약 두달뒤에 부산으로 내려가 범일동의 389부대에서 내무생활을 하면서 북진전선에 다시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쟁은 우리의 일방적인 승리로 북진이 계속되던 시점이어서 우리는 최일선으로 다시 보충되지 않고 1951년에 389부대에서 대한민국 육군으로부터의 제1차 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78세의 노인이 되었지만 총탄이 비오듯한 전쟁터에서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6·25 한국전쟁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따라서 6·25가 어떻게 벌어진 전쟁인지도 또 남북을 가릴 것 없이 얼마나 처참한 대가를 치루고 아직도 완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인지도 모르고 '6·25 북침설'을 믿으려 하는 소위 진보성향의 좌익 386세대들을 보면 가슴에 열불이 날 지경이다.(한국논단 6월호)

 지용우(전 경향신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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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특집①] 6.25 前後史의 再인식

정권이 바뀐 줄 알았는데

'6.15 남북공동선언'의 문제점

이한구 "MB정부, 좌파 10년 대못 뺀게 뭐냐"

"'제주4.3기념관 견학', 즉시 중단되어야 한다" image

학살자 김정일을 ICC에 고소해야 한다" image

"DJ와 MH의 반역‧이적행위 단죄하자!" image

"100만 이상 모이는 제2촛불 조직" image